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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5-10-13
Words:
1,259
Chapters:
1/1
Hits:
61

암초 위에서

Summary:

IS#3 미즈키 카이룰라 아버
아이린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미즈키 통합전략 스토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Notes:

인쇄물은 2025년 10월 제31회 디페스타에서 배포되었습니다. (온라인 공개본과는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Work Text:

바다가 처음 이베리아에 찾아왔을 때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찬란했던 황금기를 누리던 이베리아에는 위대한 왕실, 용맹한 영웅, 그리고 장대한 역사... 뭐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몇 번의 철썩임 끝에 모두 바다 밑에 묻혔다.

황금기도 왕국도 그렇게 끝났다. 고요함은 그런 재난이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폐허로 돌아와 이제 이베리아에 바다가 탐낼 만한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안심했다. 국토 대부분은 여전히 바닷속에 잠겨 있었지만,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 만한 위정자들도 수도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눅눅한 도시의 페허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삶과 가까워진 해안선에 적응했다.

두 번째 고요함이 임박했을 때, 이름밖에 남지 않은 이베리아를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은 없었다. 더럽고 치사한 바다가 전에 먹다 만 땅을 삼키는 사이에 도망치면 그만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고, 새로운 삶을 찾아 멀리 떠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자의 이유에 따라 남은 소수의 주민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가장 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이들은 모두가 내륙으로 도망치는 와중에 등불과 검을 들고 해안가로 나아갔던 사람들이다. 고집이 아주 세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 그 사람들은 피난민들의 경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가던 길 그대로 걸어가 파도에 맞서다 모두 죽었다.

운이 좋았던 한 명을 제외하고. 죽다 만 것. 암초 위에 선 재판관. 이름은 아이린이다.

아이린은 그 고집 센 사람들 사이에서 실력이 특별히 뛰어났던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행운 덕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언제부터인가 자신에게 더 이상 시테러들이 덤벼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달빛도 닿지 않는 어두운 암초 위, 바다 생물들의 시신이 널브러진 암초 위에 우뚝 선 아이린은 암흑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바다는 고요했고, 주변에서 더 이상 시테러의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검에 엉겨 붙은 푸른 피에서 추악한 냄새가 풍겼지만, 악취에 익숙해진 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 맞은편 해안가 방향을 바라보았다. 절벽 위에서 드문드문 빛나던 초소의 불빛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해안선이 함락된 것이 확실했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재판소가 해안선을 잠깐이나마 지킨 덕분에 적어도 한 명의 에기르인을 구할 수 있었고, 그가 재판관의 등불을 가지고 내륙으로 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다. 재판소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수 있다면 희망을 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린이 생각하기에 지금 이베리아에는 희망이 필요했다.

해안가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에 들어가려던 아이린은 자신이 방금 하려던 행위에 소름끼치는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더라?

아이린은 수영을 배운 적이 없었고, 해안가는 바위들이 점처럼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어두운 바다는 어느 때보다 친숙하다고 느껴졌고, 지금 자신이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바다를 건너 해안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이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괴물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이린은 그동안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직 검을 쓸 수 있는 손이 남아 있었고, 눈앞의 적들과 싸우고 있는 동안 아이린은 변이에 대해서는 잊고 있을 수 있었다. 아이린은 덮고 있는 로브를 들춰서 안쪽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문제없이 해안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그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괴물이 되어버린다면?
내가 언제 여기로 왔더라?

아이린은 자신이 스툴티페라 나비스 호에서 봤던 두 사람만큼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배에도 자신들의 선장과 항해사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끝까지 싸웠던 선원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과 최악의 경우를 잠시 저울질해 본 아이린은 마음을 굳혔다. 그는 이베리아의 적을 찾았고, 이제 검을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검을 쥔 아이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실패한 걸까?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대재판관은 이제 없었고, 힘을 다한 스승의 등불만이 아이린 곁에 남아있었다.이건 언제 꺼졌더라.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로 들어갔을 때 이렇게 된 걸까.

등불에도 바닷물이 고여있었다.

어쩐지 목마르다는 느낌과 함께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낀 아이린은 한가한 몽상이나 할 시간이 없음을 느꼈다. 재판관은 한 차례 크게 숨을 내쉰 뒤, 눈을 질끈 감았다.

재판소의 검이 적을 겨눴다.

정확히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눈을 뜬 아이린은 자신의 레이피어가 자신을 스스로 찌르기에는 조금 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무언가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자세를 바꾸고 이리저리 팔을 뻗어봐도 칼끝은 언제나 몸 바깥을 향했다. 당혹감에 혹시 도신을 쥘 수 있을지 시험해 보았지만, 이미 넝마에 가까운 장갑은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역시 더 짧은 검으로 바꿔야 했을까.

허탈해진 아이린은 주저앉아 이 검을 받던 날을 떠올렸다.

아이린이 정식으로 재판관에 임명된 날, 다리오는 제자가 그간 쓰던 것보다 명백히 긴 검을 가져왔다. 검을 받아 든 뒤 어리둥절해진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스승의 얼굴빛을 살폈다. 다리오는 평소와 같은 엄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잠시 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스승의 근엄한 눈빛을 바라보며 아이린은 선생님의 선택에 의문을 품어도 괜찮은 것일지 고민했다.

침묵 속에서 얼마간 마주 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리오였다.

“재판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하도록.”

“제게 익숙한 길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감히 교체를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한 명의 재판관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라.”

잠시 생각해 본 아이린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어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한 뼘 정도 길었지만,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몇 차례 휘두르고 자세를 잡아 본 아이린은 좋은 검 같다는 인상을 받았고, 이참에 간혹 아쉬웠던 리치를 보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린은 훈련 끝에 자신의 무기에 적응했다. 그가 마주했던 적들에게는 적응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이 검 덕분에 아이린은 살아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아이린은 어쩐지 다리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냐고, 아무튼 당신 탓이라고 억지라도 부리고 싶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어야만 했다. 재판관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투정하는 아이린을 혼낸 뒤, 제자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끝내야만 했다.

아이린은 스승의 망가진 등불을 안아 올렸다.

“대재판관님 때문에 이베리아의 적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헛되이 기다려 보아도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고, 왠지 울고 싶어진 아이린은 마치 자는 사람을 깨워보려는 듯 그 물건을 흔들어 보았다.

뼈대만 남은 등불이 힘없이 휘둘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언뜻 스승의 유해를 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등불이 빛나던 시절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불빛이 빛나던 자리엔 이제 그을음만 남아있었고, 이제 그 빈 공간 너머로 보이는 건 어두운 바다뿐이었다.

정확히는, 해수면, 물결, 그리고……반짝임?

바다에 비친 별빛을 눈치챈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조용한 바다 위, 물결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별들도 소리 없이 반짝였다.

아이린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대해 말해주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로렌티나는 지금 저 멀리 바닷속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문득 아이린은 로렌티나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계속 아기새라고 부를지 궁금하다는 생각이—아니야!—그래, 외침이 암초 위에 맴돌았다.

심기일전한 아이린은 손에 쥔 등불을 노려보았다.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었다.

등불의 물기를 털어내면서도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닐까, 불안한 생각이 스쳤지만 아이린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조용히 잠들어있던 등불은 익숙한 사람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불꽃을 피워냈고, 재판관의 명령에 따라 점점 밝아졌다.

빛이 암초 위를 밝히기 시작하자 아이린이 확인하지 않으려고 했던 변화도 점차 선명해졌다. 주변이 환해지자 무심코 옷매무새를 살펴보려던 아이린은 가까스로 비명을 참은 뒤,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황금 시대라는 건 뭐였을까?

아이린은 스툴티페라 나비스 호를 떠올렸다.

역사가들이 감히 묘사하지 못한 화려함.

보이는 곳마다 아낌없이 쓰인 황금과 정복된 바다의 파란색, 그리고 그 공간의 모든 찬란함이 더 돋보이게끔 배치된 수많은 잿빛 타일.

아이린은 그날 자신이 진짜 회색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이베리아의 회색은 물결에 쓸려나간 뒤 남은 잔해의 빛깔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 단단하게 붙어있었다. 아이린은 보고 있자면 어쩐지 간지러워지는, 그 생소하고 사치스러운 회색이 어쩐지 꽤 마음에 들었다.

스툴티페라 나비스 호에서 이베리아에 존재했던 번영의 편린을 접한 이후, 아이린은 재판소가 어째서 이미 사라진 이베리아의 황금기에 그렇게나 연연하는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재판소는 더 나았던 과거를 인양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언젠가 사람들이 예전의 아름다운 고향을 되찾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이베리아는 이미 한 차례 고요함에 맞서 승리한 뒤 살아남았다. 아이린은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잠시 후, 아이린은 등불을 든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등불은 무언가 한계에 도달한 듯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잠시 진동을 제어해 보려고 시도한 아이린은 등불을 들지 않은 손도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등불은 이제 제법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고, 마침내 등불 손잡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달아오르자 놓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아이린은 그 물건을 그대로 품에 가져가 힘껏 안았고,

스승이 남긴 불꽃이 제자를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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