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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디터스도르프

Summary:

마지막 디터스도르프에겐 책임을 다해야할 의무가 있다.

Notes:

*비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며, 폭풍우에도 사람은 쉽게 휩쓸려가지 않는다. 그것은 평범한 재해에 불과했으니.

폭풍우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선의 이야기입니다.

(See the end of the work for more notes.)

Work Text:

디터스도르프 가문의 대가 끊겼다.
가문을 이어가야 했을 테오필은 독감이 심해져 폐렴에 걸려 죽어, 지금은 6피트 아래의 깊은 땅속에 자신이 사랑하던 작품들과 함께 묻혔다. 젊고 유망한 청년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고, 고귀한 가문의 미래를 걱정했다.

“이졸데 양이 어서 결혼해서 대를 이어야 될 텐데요.”
“하지만 이졸데 양이 벌써 은퇴하는 건 모든 빈 사람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줄 겁니다!”
“에반젤린도 결혼한 후에 왕성하게 활동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재능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을 미래를 생각하세요…”

빈의 모두가 마지막 디터스도르프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했다. 디터스도르프 가문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반면 이졸데는 볼 일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집 정리가 얼마나 끝났는지, 남은 메이드들이 어디 있을지. 테오필의 모델들에게 해줘야 했던 정산도 끝마쳤다. 어쩌면 오늘은 저택에서 재배하는 재스민 차를 마시고 푹 쉴 수 있을 것이라고, 마지막 디터스도르프로서 의무를 다했으니, 그녀를 기다릴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디터스도르프 가문의 문 앞에서 이졸데를 기다리고 있던 짐 하나가, 그 모든 희망, 욕망, 연민, 괴로움에 상관하지 않으며 디터스도르프의 미래를 바꿔버렸다.

검고 구불거리는 머리칼, 불투명한 눈동자의 여자아이. 5~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파란 체크무늬의 리넨 드레스를 입고 저택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이의 구두는 흙과 먼지가 질척하고 머리는 잔뜩 떡지고 헝클어져 있어서 디터스도르프 가의 저택 앞에서 보기 드문 행색이었다.
“뭔가 볼 일이 있니?” 사용인들은 테오필의 장례가 끝나고, 테오필의 물품을 정리하는 바쁜 나날을 지낸 후 대부분 고향으로 휴가를 가서 이 아이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선생님이 보낸 아이일까? 아이는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닌지 이졸데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품에서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고인이 된 테오필의 아이입니다. 저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쪽지를 돌려주며 이졸데는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테오필을 닮았나… 그보단 트리스타를 닮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닮은 아이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겠지. 이졸데는 아이의 눈이 신경 쓰였다. 이졸데를 바라보다가도 이따금 그 옆을 살펴보는 그 눈. “너도 이 신사분이 보이니?” 아이가 이졸데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졸데 옆의 신사분은 오페라 하우스의 열광적인 팬으로, 이졸데에게 언제 무대에 설 것인지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신사분이 격앙되게 말할 때마다 아이가 움찔거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디터스도르프의 명맥은 테오필이 지켜낸 것 같았다.

“이름이 뭐니?” 테오… “테오도라…” 볼이 홀쭉 패인 아이는 힘이 없는지 건조한 목을 긁듯이 대답해 주었다. 이졸데는 주변을 살폈다. 진입구가 돌출되어 있지 않으니, 사람들은 분명 아이가 오가는 걸 못 봤겠지. “이쪽으로 따라오겠니?” 아이는 순순히 이졸데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현재 저택에 남아 있는 사용인이 어디 있을지 고민하며, 이졸데는 조심스레 부엌을 통해 아이를 집안으로 데려왔다.

테오필의 방으로 들어오면서 이졸데는 며칠 전 메이드들이 정리해 두었는데도 벌써 먼지가 쌓였단 걸 깨달았다. 가득 쌓인 실패작, 값비싼 액자, 그리다 만 여자들의 알몸 스케치에도 먼지가 쌓여있었다. 심지어 이졸데의 눈에는 반갑지 않은 얼굴들도 보였다. “… 네 눈에는 뭐가 보이니?” 테오도라는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눈을 아래로 깔고 이졸데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이졸데 옆의 유령과 눈이 마주치기 싫어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얼마나 많은 유령이 자신을 기다리는지 보고 무서워진 걸까.

이졸데는 무릎을 꿇고 아이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정면을 바라보게 했다. “싫어…” 아이는 버둥거리며 고개를 돌리기 위해 애썼지만, 어른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 무섭니?” 아이는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말도 안 나올 만큼 무섭나 보구나. “너의 어머니는 어째서 널 버렸니?” 아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해졌다. 무섭다면서 바닥을 내려다보는 행동만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 나중에 식사를 가져다줄 테니 여기 얌전히 있으렴.” 사람들이 알게 되면, 네가 곤란해질 수도 있단다. 이졸데는 매달리는 아이를 조용히 떼어내고 문을 닫았다.

복도를 걸으며, 이졸데는 테오필만큼이나 유약한 그의 딸에 대해 생각했다. 유령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타인에게 매달리는 아이는 얼마나 유약한가, 이졸데는 아이를 구원해 주고 싶었다. 더 고통받기 전에, 그 고통을 끝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졸데는 그날 저녁 아직 휴가를 떠나지 않은 부엌의 요리사에게 떠나기 전 테오필이 가장 좋아하던 수프를 부탁했다. 요리사는 그런 그녀를 측은하게 쳐다보았고 이졸데 역시 기대에 부응하며 창백하게 웃어주었다. 애써 웃는 것처럼.

아이는 수프와 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어릴 적 약 먹는 걸 싫어하던 테오필이 아플 때면 매기는 향신료가 들어간 이 수프를 끓여 오게 해, 테오필에게 떠먹여 주었었다. 짙은 향신료 향을 이졸데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수프를 충분히 끓여뒀으니 다음날에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잘 먹어주면 좋을 텐데. 깊은 생각 속에서 이졸데는 허겁지겁 먹던 아이의 어깨를 잡고, 등을 펴고 우아하게 먹을 수 있게 교정해 주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교육을 등한시하진 않은 건지, 그제야 아이도 예법에 맞게 수프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이졸데는 테오필에게 사생아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사를 메이드에게서 건네받았다.

“디터스도르프 가문의 후계자? 화가의 사생아.”

이졸데의 우려와 달리 만약 디터스도르프 가문에 후계자가 있다면 남자아이일지, 여자아이일지를 논의하며 재산분할에 대해 점잖지 못한 의견을 내놓은 저질스러운 신문이었다. “저희는 이런 소문을 믿지 않지만, 이졸데 양이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졸데는 휴가를 떠나지 않을 예정이었던 고용인 중, 화원과 장원을 돌볼 사람을 남기고 모두 휴가를 보냈다. 고용인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이졸데는 아이를 확인하기 위해 테오필의 방으로 향했다. 아이는 늦은 시간까지 자고 있었다. 테오필의 낡은 침대 위에서 불편함 없이 잠든 아이는 누가 들어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잠에… 짓눌려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악몽을 꾸는 걸까? 어쩌면 그 악몽을 지금 끝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졸데는 아이가 몸부림치다 떨어뜨린 베개를 주워들었다.

“이졸데 양, 어디 있나요?” …복도에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선생님?” 이졸데는 아이의 머리맡에 베개를 두며, 아이를 나중에 씻겨줘야겠단 생각을 했다. 어젠 경우가 없어 아이가 입을 옷을 마련해주는 것도 깜빡했다.

“선생님, 어쩐 일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셨나요?” 문도 닫혀있을 텐데, 어쩌면 담장을 넘어오신 걸까. 조심스레 문을 닫고 1층으로 내려온 이졸데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는 카카니아를 찾았다. 카카니아의 환한 얼굴을 볼 기대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나왔는데, 아… 당신은 어째서 그런 표정인 거죠? 누가 당신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킨 걸까요?

“테오필에 대한 기사를 읽었어요. 난… 미안해요. 당신이 걱정돼서 무작정 찾아왔는데, 장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정원사가 날 들여보내 줬어요, 고용인 전부 휴가 보냈다고요? 지난번에는 최소한의 인원은 남겨둘 거라고 했잖아요…” 내가 당신에게 근심을 안겨드렸군요. 이졸데는 당장이라도 카카니아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싶은 동시에 카카니아를 안아주며 위로하고 싶어졌다.

“전 괜찮답니다.” 이건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지난 몇 주 간 테오필의 모델과 관련한 기사는 도 얼마나 많았던가. 이졸데에게는 또 다른 하루일 뿐이었다. “하지만…!” 카카니아는 이졸데의 반응에 오히려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카카니아는 한숨을 푹 쉬더니 저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넓은 곳에서 혼자 지낸다니—. …응?” 카카니아가 안경을 고치며 2층의 한구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 선생님?” 이졸데가 카카니아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자고 있어야 했을 아이가 깨어나서 문을 열고 나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카니아는 난간으로 삐죽 튀어나온 아이의 얼굴을 찌푸리며 쳐다보다 깨달음을 얻은 건지, 이졸데를 놀라 쳐다보았다. “이졸데 양, 설마 저 아이가…?” 카카니아에겐 보여줄 생각이 없었는데, 어째서 나온 거지. 어제 했던 말을 까먹은 걸까. 카카니아는 이졸데를 지나쳐 계단을 단번에 올라가서는 아이에게 향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항상 아이들에게 친절한 카카니아는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 맞추며 물었다. 이졸데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중인데도, 아이는 자꾸 카카니아 뒤의 이졸데를 흘낏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이졸데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아이는 그제야 카카니아에게 조그맣게 이름을 속삭여 주었다. “어머, 예쁜 이름이네!”

“테오필… 너의 아버지와는 만나본 적이 있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테오필은 어째서 아이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걸까, 이졸데는 생각했다. “어머니와 둘이서 살았니?” 아이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테오도라…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고?” 이번에는 고민하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아이. “엄마가… 아빠랑 같은 이름이 좋다고 이렇게 지었대요…” 그래, 그랬구나… 카카니아는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선생님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방에서 기다려주겠니?” 마침내 2층까지 올라온 이졸데는 아이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울먹인다. “하지만 방에는…” 이졸데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테오필을 사랑한 여인들. 테오필이 사랑한 모델들. 어린아이에게마저 질투하며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방에 뭔가 있나요?” 카카니아는 영문을 모르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졸데는 한 번도 집에서 겪은 일을 카카니아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테오필의 방이었답니다…” 이졸데는 카카니아가 아이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를 놀이방에 데려다주고 와서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라면 이 아이를 함부로 남겨두지 않겠죠, 이졸데는 생각했다.이졸데의 속마음도 모르고 카카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도라가 그냥 문밖에 버려져 있었다고요?” 카카니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테오필과 가장 친하게 지내던 하인리히도 빈을 떠난지 오래고, 친모에 대해 알 방법은 없겠군요…” 카카니아는 이졸데에게 설명을 듣고 열을 올리며 테오필이 근 몇 년간 어울렸던 여성들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 아까 아이의 상태를 보셨잖아요. 그 아이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아이는 이미 고통받고 있었다. 그런 고통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머니라면 아이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졸데 양, 그건 당연해요! 물론 나에게 결정할 권한은 없지만, 모친이 저 아이를 방치하며 키웠다는 건 명확하고… 난 그저 테오필이 자기 친자식을 저렇게 방치해둔 걸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래요!” 그가 이렇게까지 무책임할 줄은 몰랐는데…! 카카니아는 한때 사랑했던 친구의 몰랐던 일면에 충격받은 듯 보였다.

“테오필은 정말 몰랐을 거예요.” 이졸데는 테오필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애초에 그는—. “그게 무슨 뜻이죠? 도라는 테오필을 만나봤다고 했잖아요?” 아이는 디터스도르프의 후계자, 테오필이 죽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둘 중 누군가 마음을 먹었다면, 염원하였다면, 운명에 이끌려 서로를 만났을 것이다. “테오필은 딸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분명 좋아했을 거예요. 저에게도 다정한 오빠였으니까요.” 아이가 낡은 리넨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 이졸데에게 그랬듯이 선물 공세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카카니아는 이졸데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든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숨을 쉬며 어떻게든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도라는 어떻게 할 건가요?” 이졸데는 복도에서 접견실까지, 카카니아가 묻기까지 수많은 질문 속에서 적절한 대답을 찾아냈다.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으며 아이를 돌보려면, 외국에 보내는 게 최선일 거예요.” 국외에 딸아이가 귀한 먼 친척 집안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환영해 줄 것이라고, 이졸데는 카카니아를 설득했다.

“... 오빠가 남긴 아이잖아요… 이제 마지막 남은 당신의 가족이고, 이졸데 양은 그걸로 괜찮나요?” 카카니아는 테이블에서 손을 뻗어, 찻잔 받침을 잡고 있던 이졸데의 손 위로 포개며 온기를 전했다. 두 눈은 걱정으로 가득하고, 이졸데의 고통을 담아내려는듯 투명했다. “... 아이를 위한 조치니까요.” 하지만… 뭔가 말하려던 카카니아는 입을 꾹 다물고 아쉬운 듯 손을 떼며 물러났다. 카카니아가 멀어지는 광경에 이졸데는 접시가 깨져도 상관없으니, 카카니아에게 다시 닿기 위해 손을 뻗고 싶었다.

“...그래도 난 당신이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어요. 상황에 저버리지 않았으면 해요.” 카카니아는 보이지 않는 적에 패배한 듯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자신은 포기하지 않은 듯. “어쩌면… 아직 도라가 이 집에 있다는 건 누구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데리고 있으면서 생각해 보면 안 될까요? 나도 도울 수 있으니까요.” 아이 돌보는 건 자신이 있어요. 카카니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만, 이졸데에게는 곤란한 소식이었다. 그렇게되면… 아니, 어쩌면 카카니아와 아이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친척집에 연락을 넣고,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걸릴 거예요. 어쩌면 그동안 아이를 봐주러 오셔도 좋을 것 같아요.” 최소한의 경호만 세워두면 그들을 방해할 이들은 없겠지. 이졸데는 열심히 생각했다. 선생님을 위해, 아이를 위해.

카카니아를 보낸 후, 이졸데는 아이가 놀이방에서 끙끙 앓으며 조용히 울던 것을 발견했다.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던 유령들은 이졸데를 반겨왔지만, 이졸데는 평소와 달리 그들을 지나쳐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 많이 기다렸니?” 아이는 실눈을 뜨고 이졸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 나중에 식사를 줄 테니, 먼저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게 어떨까?”

아이는 옷을 벗는 게 두려운 듯 여러 차례 이졸데의 손길을 피했지만, 이졸데가 손을 치우고 기다리자 천천히 옷을 벗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아이의 배와 등에는 멍 자국이 여럿 나 있었다. 이졸데가 멍 자국 중 하나를 꾹 누르자 아이는 움찔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많이 아프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아이가 이졸데의 말을 잘 듣고 얌전히 있었다면 이런 고통도 끝났을 텐데. 어째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나온 걸까.

이졸데는 아이의 멍 자국을 누르던 손가락을 떼고, 욕조 안에 들어간 아이를 천천히 씻겨주었다. 처음엔 긴장하고 있던 아이도, 따뜻한 물 속에서 긴장을 풀고 다리를 쭉 뻗고 욕조의 벽에 등을 기댔다.

“헉!” 하지만 이 집에는 짓궂은 유령이 살고 있었다. 자신과 닮은 여자아이를 쫓아다니며 놀아달라고 아우성치는 여자아이 유령. 아이는 발목을 잡힌 건지 물 속으로 끌어당겨지며 양 손으로 욕조를 잡으려 허우적거렸다. 첨벙거리며 이졸데에게까지 물이 튀고, 이내 아이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본 이졸데는 천천히 아이를 끌어올려 주고 등을 쓸어주며 아이가 물 뱉는 걸 도와주었다. “... 트리스타는 짓궂으니까 조심하렴.” 아이는 얌전히 이졸데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목욕을 마쳤다.

선생님을 만족시킨 후에는 이 아이의 괴로움도 덜 수 있겠지, 이졸데는 생각했다.

이졸데는 아이가 입고 있던 리넨 드레스를 두고, 이졸데 자신이 어릴 적 입던 드레스를 아이에게 입혔다. 하지만 아이는 갑갑한 듯, 무거운 듯 이졸데 눈치를 살피며 옷깃을 잡아당겼다. “... 많이 불편하니?” 아이는 이졸데의 질문에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고 갑갑해요.” 그렇구나… 하지만 이졸데에게는 이런 옷밖에 없어서 아이의 갑갑함에 함께 공감해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건 귀족 여성들이 입어야하는 옷이었으니까.

“화구를 줄 테니 그림을 그리고 놀겠니?” 이졸데는 종이를 비롯해, 아이가 쓸만한 뭉툭한 도구를 몇 개 골라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창문에서 떨어져서 걷고, 저택 바깥에만 나가지 않는다면 어느 방에 들어가도 괜찮아.” 다만, 그 방에 있을 손님들 앞에선 예의 바르게 행세하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 작은 몸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이졸데는 노래 연습을 끝낸 후, 아이를 찾아나섰다. 아이는 복도에 누워 낙서를 하다 잠든듯 했다. 이졸데가 노래 부르는 모습… 아이의 그림 실력은 꽤 훌륭했다. 작고한 테오필의 한미한 실력에 비하면 충분한 잠재력이 보이는 확신으로 가득찬 획. 아이의 어머니가 가르쳐준걸까. 어쩌면 채널링에 성공한 건 아닐까. 이졸데는 아이를 깨워 부엌에서 식사한 후 아이를 다시 테오필의 방에 데려다주었다. 아이는 다시 방에 들어오는게 탐탁치 않은 듯 보였지만 이졸데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졸데는 아이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파자마를 입혀주고 눕혔다.

“노래…” 아이가 중얼거렸다. “응?” 아이는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감추고 웅얼거렸다. “노래를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잠들기 무서워요. 이졸데 역시 어릴 땐 쉽게 잠들지 못했다. 트리스타는 이졸데가 아기일 때 얼마나 울보였는지 아냐며 놀리길 좋아해서, 이졸데 대신 그런 날들을 기억해 주었으니까. “자장가를 불러줄까?” 아이가 이불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는지 이불이 들썩거린다. 무슨 노래를 불러주면 좋을까,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주던 그 노래를 불러볼까—. 이졸데가 노래를 부르는 사이, 아이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로.

다음날부터는 카카니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카카니아는 전날 일찍 저택에서 나간 후로 아이가 입을 옷과 세 사람이 먹을 음식을 사고다닌건지 짐을 바리바리 싸 왔다. 카카니아가 가져온 옷은 전날 아이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스타일이라, 아이도 입어보더니 편한지 자그만 목소리로 카카니아에게 고맙다며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저택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에, 카카니아는 아이와 노는 것을 어려워했다. “제가 어릴 땐 무조건 바깥에서 놀았거든요.” 카카니아는 아이가 그림 그리는 걸 지켜보며 자신이 어릴 적 오빠와 함께 골목을 쏘다닌 이야기를 해주었다. “... 도라는 지금 많이 힘들 거예요. 버림받았고, 낯선 환경에서 당신과 둘 뿐이니까요.” 카카니아는 이졸데에게 함께 어울려보라며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소파까지 굴러온 파스텔을 하나 주워서 이졸데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졸데 양이 그림도 그리는진 잘 모르겠지만, 도라와 시간을 보내며 추억도 쌓고 공감대도 형성해 보세요!” 이졸데는 카카니아의 기대에 응해주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아이 옆에 앉았다. “어떤 걸 그리던 중이었니?” 아이는 이졸데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그림을 이졸데 앞으로 밀었다. “이건…” 이졸데와 카카니아가 단란하게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소파 아래에는 도라가 누워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앉아있었을까?

“... 여기 햇빛이 비치는 곳은 색을 좀 더 따뜻한 걸 쓰는 게 어떨 것 같니?” 카카니아에게 따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이졸데 역시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이졸데는 아이의 그림에서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채워주었고, 아이는 조용히 이졸데의 조언을 들으며 그림을 고쳤다. 이졸데가 어릴 적에도 이렇게 모든 것을 배웠었다. 수많은 기대와 엄격한 훈육 아래서.

이졸데가 고개를 들었을 때 카카니아는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신 걸까? 이졸데가 아이를 두고 카카니아를 찾아 나서려던 그때, 복도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모두 저녁 먹으러 오세요!” 누군가 복도에서 소리치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이졸데는 하인호출벨을 살펴보고, 아이를 일으켜 세워 카카니아를 찾아 부엌으로 향했다. … 선생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갈 수 있다니, 이쪽이 더 즐거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카카니아가 준비한 음식은 호이리게. “제가 요리한 게 아니니 안심하고 먹어요!” 카카니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소시지와 채소를 접시에 덜어 나눠주었다. “도라는 골고루 많이 먹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를 받았다. “이졸데 양도 많이 먹어야 해요!”

카카니아는 평소 이졸데가 먹는 것 이상의 양을 아이와 이졸데에게 퍼주었다. “이건… 너무 많지 않은가요?” 이졸데는 당황해서 자신과 아이의 그릇을 보았고, 포크로 고기를 찍어서 뜯어먹으려던 아이는 이졸데의 눈치를 보며 멈췄다. “네? 이졸데 양, 그게 무슨 소리죠…? 이 정돈 먹어야 자기 전까지도 배가 안 고프죠!” 어서 드세요, 어서! 카카니아는 이졸데를 보챘고, 이졸데가 마지못해 식사를 시작하자 아이 역시 이졸데를 살펴보더니 카카니아를 따라 예법에 맞지 않는 식사를 이어갔다.

카카니아가 오가며, 며칠 동안 저택에서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카카니아는 아이가 버림받았다는 생각하지 못하게, 환영받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아이와 이졸데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꼭 가지게 만들어, 아이가 좋아할 만한 활동을 하고, 아이가 실수를 해도 쉽게 지적하지 않았다. 이졸데가 카카니아와 함께 있으면, 친절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카카니아가 낮은 시간까지 머물러주길 바랐고, 카카니아가 더 자주 찾아오게 된 것이 기뻤던 이졸데 역시 이기적이지만,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고맙습니다...” 아이는 이불을 덮어주며 자장가를 불러줄 준비를 하던 이졸데에게 속삭였다. “뭐가 고맙단 거니?” 이졸데는 아이가 감사할 만한 것을 해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지내게 해주시고, 매일 맛있는 밥을 주고 계시잖아요.” … 이졸데는 그에 대해 다른 할 말이 없어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체했다. “집 안의 다른 존재들이 무섭지 않니?” 지금도 호시탐탐 이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존재들이었는데.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 방에서 자고 싶어 하지 않았으면서.

“유령은 어딜 가도 있는걸요?” 아이는 눈을 끔뻑거렸다. 게다가… “매일 따뜻한 밥을 먹고, 뛰어다녀도 혼내지 않으니까 너무 행복해요!” 이 모든 건 유예된 행복이라는 걸, 아이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잠깐 행복할 수 있겠지만 그뿐이었다. 만약 네가 정식으로 가족의 일원이 된다면, 너는 어릴 적 내가 겪은 그 모든 걸 겪어내야 했다. 어쩌면 더욱 가혹한 시선이 따라붙겠지. 유명 화가의 사생아, 그게 너였으니까.

그리고 네가 이 저택에서 빠져나간다 해도 언젠가 광기가—,
…이졸데는 아이가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그 친척분이 당장 내일 도라를 데리러 올 거라고요?” 카카니아는 도라가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인지, 적잖이 충격받은 눈치였다. “... 고용인들이 돌아오면 도라에게 대해 눈치채게 될 거예요. 그러면 그 아이의 삶만 더욱 힘들어지겠죠.” 아이를 영원히 저택에 가둬둔다 해도 소문이 날 것이다. “하지만… 난… 당신이…” 카카니아는 말을 더듬다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당신이 사람들 시선 때문에 소중한 가족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도라가 또다시 버림받는다고 느끼지 않길 바랐지만… 제 욕심이겠죠.”

이졸데는 상심한 카카니아를 보며 당장이라도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위해, 카카니아를 위해 꾹 참았다. “이게 최선이라는 걸, 아이도 나중에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가 떠날 준비를 해야 된다는 이유로, 이졸데는 카카니아를 서둘러 보냈다. 혼자 놀고 있던 아이는 카카니아가 저녁을 먹지도 않고 사라진 것에 속상해했다. “수프는 다 마셔야 해.” 너무도 속상한 나머지 이졸데가 준비한 수프마저 마다하고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어요.” 고작 이런 일로 투정을 부린다고? 이졸데는 당황해서 아이 앞으로 수프를 떠밀었다. “선생님도 네가 수프를 마시면 좋아하실 거야.” 그는 너무 상냥해서 네가 고통받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아이는 이졸데가 카카니아를 언급하자 움찔거리더니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떴다. “...왜 그러니?” 하지만 아이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뜨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수저가 갑자기 검게 변했어요.” 어제 먹을 땐 안 이랬는데. 아이는 불안하게 눈을 껌뻑거리더니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상해요… 안 먹으면 안 될까요?”

…어째서 수저를 바꿔두는 걸 깜빡한 걸까. 네가 토끼였다면, 아펄슈트루델과 플라워였다면 숟가락이 바뀐 것도 몰랐을 텐데. “먹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단다.” 디터스도르프 가의 저주를 받은 아이, 이른 나이에 광기를 맞이해 자신의 혈육을 죽이러 찾아온 사생아에게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디터스도르프가의 영애는 자기방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고모…”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숨을 가쁘게 쉰다. 순종적이고 착한 아이는 도망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욕조에 들어가면 트리스타가 나를 도와주겠지, 그도 아니면 아이가 좋아하는 자장가를 들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건 싫어요…” 무서워요.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 몸에 들어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너를 넘어지게 만들고, 물에 빠뜨리고, 짓누르던 유령들도 똑같이 무섭지 않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더 무서워요.” …어째서? 이졸데는 진심으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였다면 감사하게 여겼을 텐데. 사생아라는 수치심에서도, 버림받았다는 괴로움에서도, 평생을 시달릴 광기에서도 해방될 수 있을 텐데. “모르겠어요. 그냥 무서워요. 카카니아 선생님이 보고 싶어요.” 선생님은 어디 가셨나요? 아이가 카카니아를 찾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네가 고통받길 원하지 않을 거야.” 아이가 이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모는 선생님이 안 보이면 나를 괴롭히잖아요.”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요. 엄마처럼… 아이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울먹였다. “불편한 옷을 입히고, 예법을 지켜야 한다면서 혼내고, 내가 무섭다고 하는데도 방에 가두잖아요.” 내가 너를 괴롭혔던가… “하지만 그건 네가 디터스도르프의 후계이기 때문에 당연한 거란다.” 귀족은 모범을 보여야 했다. 누군가 보지 않을 때도 따라올 시선을 의식해 행동해야 하는 게 귀족이었다. “너는 사람들이 너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해낼 수 있어야 해…”

“...선생님은 저에게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고 살라고 하셨어요!” 아이는 디터스도르프의 의무 따위 상관없다는 듯 카카니아 이야기를 꺼냈다. “넌… 네가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믿니?” 언젠가 미쳐버릴지도 모르고, 귀족답지 않다고, 사생아라고 손가락질당할지도 모르는데?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님은 주변에 손가락질당해도 당당하게 산다고 하셨어요!”

이졸데가 카카니아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귀족으로서… 하지만 선생님의 바람이라면… 이졸데는 때때로 카카니아의 선택도, 결정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카카니아가 그렇게 믿는다면 어쩌면 이 아이는 광기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카카니아는 결국, 이런 문제에 대해 이졸데보다 훨씬 뛰어난 선구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수프가 상한 것 같으니, 내일부턴 다음 음식을 내오도록 할게.” 아이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라는 벌써 갔나요?” 카카니아는 헉헉거리며 뛰어왔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앵무새 인형인가요?” 카카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라에게 저를 기억할 만한 물건을 주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늦었나 보네요. 카카니아는 낭패라는 듯 한숨을 쉬며 표정을 찌푸렸다.

이졸데는 고개를 저었다. “착오가 있어서… 이모께서는 다음 주에나 올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졸데는 아침 일찍 국외의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며 아이를 맡아서 기를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이모는 소리를 지르며 기뻐서 이졸데의 귀가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평소에는 수다스럽고, 귀족답게 행실을 하지 못한다며 아버지가 못마땅해하던 친척이었지만, 도라는 이런 집에서 살고 싶은 거겠지, 싶었다.

“... 그래서 아이 이름이 뭐니?” 가면서 아이가 쓸 손수건과 옷에 이름을 수 놓아주고 싶어. 이졸데는 고민하다 아이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도라… 도라예요.” 다른 이름은 필요 없을 것이다. “무척 사랑스러운 이름이구나.” 이제 이모는 도라를 데려가기 위해 일주일 뒤 빈으로 올 것이다.

“... 도라에게 그 인형을 주면 무척 좋아할 것 같아요.” 카카니아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걸렸다. “그렇죠? 역시 도라가 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어요!,어릴 적부터 아이들이 저를 무척 잘 따랐거든요. 놀 때도 항상—…… 이졸데?” 카카니아의 손에서 결의 반대방향으로 뒤집어진 인형 털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아이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 걸까? 이졸데도 이런 인형을 좋아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졸데 역시 이런 인형을 받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졸데는 하트 모양 포켓 목걸이를 도라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건 뭔가요?” 이졸데는 포켓을 열어 보여주었다. “내가 어릴 때 테오필에게서 받은 선물이란다.” 그가 주었던 수많은 선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졸데는 포켓의 사진을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작은 봉투를 보여주었다. 지난번 저녁 식사에 사용하고 남은 가루였다. “... 너무도 괴로워서 견딜 수 없게 되면, 이걸 쓰렴, 너를 해방해 줄 거야.” 이건 이졸데가 디터스도르프 가문의 후계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었다. 귀족 영애에게, 비극의 여주인공에게 어울리는 결말을 선사해 줄 테고, 아이가 커서 어떤 결말을 내릴지 직접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카카니아는 친척 이모가 아이와 함께 기차를 탈 때도 이졸데 옆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너무 슬퍼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카카니아와 아이가 만난 순간부터 예기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졸데는 힐끗, 카카니아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타인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걸까. 하지만 카카니아의 그런 면이 좋았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라가 떠났으니 그 다정함은 이제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오겠지, 생각이 들었다.

“도라는 행복하게 잘 자랄 거예요.” 카카니아는 유리창 너머로 아이가 앉는 것을 지켜보며 웃었다. “테오필을 닮아서 명랑한 면이 있던데, 분명 행복하게 자랄 거예요. 당신의 이모도 무척 활발한 분이셨고, 그곳에서 잘 살 거예요.” 카카니아가 그렇게 믿는다면, 이졸데는 진심으로 도라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언젠가 미쳐버리지 않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랄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저밖에 남지 않았네요…” 이졸데야말로 마지막 디터스도르프였다. 이 모든 의무와 책임을 다할 사람은 그녀밖에 남지 않았다. “제가 있잖아요.” 카카니아는 고개를 돌려 이졸데와 눈 맞추며 생긋 웃었다. 카카니아와 그녀의 꿈… 이졸데는 익숙한 손길로 정류장의 거친 바람에 뒤집힌 카카니아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고,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물론… 선생님이 함께해주신다면 전 괜찮을 거예요.” 남아있던 비소는 기차를 타고 사라졌다. 구하려면 더 구할 수 있겠지만, 그럴 필요를 느낄 수가 없었다.

“지난번의 그 이야기를 또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카카니아가 안경을 고치며 눈썹을 찌푸렸다. “... 무슨 이야기였죠?” 개혁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아! 사회 개혁이라면 말이죠. 최근에—.” 이졸데는 카카니아와 팔짱을 끼고 카카니아와 발걸음을 옮겼다. 카카니아의 이야기 속에서, 이졸데는 두렵지 않았다. 어쩌면 우린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졸데는 도라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카카니아의 꿈이 이뤄질 수 있기를—.

그렇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모든 것이 당신을 위했기 때문이다.

Notes:

이졸데는 립구에서 가장 사랑하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인데요. 이졸데와 카카니아의 개인 스토리까지 보고나니 두 사람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해서, 미루고 미루다 새해가 가기 전 써보기로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사실 소재 자체는 6장을 밀고 난 직후 클림트 사후 친자소송건을 떠올리며 이졸데와 카카니아가 아이를 함께 기르는 걸 보고싶다는 가벼운 생각을 하며 떠올린 것이었는데요, 개인스를 보고 난 이후에는 이졸데가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집중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소재가 소재다 보니 잘 쓸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다 쓰게되었습니다.
그런 글이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명확한 계획을 통해 쓰인 글도 아닐 뿐더러, 저도 불확신 속에서 쓰게되어서...
아무튼 올 한 해 립구를 알 수 있어서 정말 기뻤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